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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가 - 국립국악관현악단 문형희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며 새로운 예술의 삶을 찾아가는 이 시대의 예술가

이미지 국립국악관현악단

 

이달의 예술가

국립국악관현악단 문형희

공공디자인저널 문혜은 큐레이터

 

우리가 오랫동안 개념화하고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삶의 방식에서

탈피하는 것, 그 삶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며

새로운 예술의 삶을 찾아가는

이 시대의 예술가 문형희를 만났다.

 

이미지 국립국악관현악단

 

지난해 3월 신천동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렸던 양방언과 국립국악관현악단-인투 더 라이트(Into the Light)에서 국립국악관 현악단은 아리랑 로드-디아스포라를 선보였다.

디아스포라는 정치·종교적 이유로 삶의 터전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던 공동체 집단을 뜻한다.

재일동포 2세로 역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산 양방언은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아리랑’을 소재로 총 7악장을 써내려갔다. 이날 공연은 국악관현악 교향곡으로 이들을 위로하는 여정과 동시에 국악관현악단의 멋진 사운드와 역동적인 연주로 2000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에게 큰 감동과 여운을 선사했다.

특히 5악장 ‘잃어버린 아리랑’, ‘연어아리랑’, ‘빠뜨라크아리랑’을 새로 작곡된 아리랑을 선보였는데 이날 예술감독 업무대행 겸 악장인 문형희는 남성 독창부분을 노래했다.

문형희 악장의 담백하면서도 전문가 뺨치는 노래 실력은 그날 온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뿐이랴. 문형희는 현재 뛰어난 기량을 갖춘 대금연주자이며 국립국악관현악단 및 유수의 관현악단을 지휘한 지휘자이며,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스펙트럼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자신의 예술가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었으며 그 결과 그는 고정되어진 틀에서의 예술적 행위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수용,열린 마음,문형희의 성향에는 나고 자란 집안의 분위기가 큰 영향을 끼쳤다. 풍금을 치길 즐기시던 아버지. 노래를 좋아하시는 어머니 피아노,기타,하모니카를 불면서 지냈던 두 누나와 형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냈던 문형희는 성인이 되면 완성된 음악으로 더 잘 그려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의 음악적 꿈과 갈증은, 지금의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해소되었고, 지금의 국악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대금을 전공한 문형희는 스승이자 영혼의 지도자이신 이생강 선생님을 만나 산조를 배웠다. 그는 현재 이생강 선생님의 대금산조 이수자로 활동하고 있다.

과감한 시도와 개방성, 서양음악과 국악의 협업에 주저함이 없던 이생강의 여러 시도는 그 시절의 문형희의 생각과 맞닿는 부분이 있었다. 그 자체에 큰 영감을 받은 문형희는 다양한 음악을 수용하는 마음과 태도로 공부하였다.

이후 중앙대학교에 진학한 문형희는 박범훈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음악적 영역을 더 넓혀갈 수 있었다. 그 이전의 국악관현악은 그에게 있어 관심을 끌만큼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박범훈의 중앙국악관현악단은 그렇지 않았다.

박범훈은 서양적 작곡기법과 화성을 전통음악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는 능력을 보였고 국악관현악을 통해 훌륭한 사운드로 완성해보였다.

 

그 당시 저는 국악관현악으로도 서양오케스트라처럼

저렇게 멋지게 연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박범훈의 중앙국악관현악단의 과감한 시도와 개방성이 저에겐 큰 영감이 됐습니다.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박범훈의 시도와 개방성은 문형희에게 또 다른 가능성과 용기를 깨닫게 해주었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 문형희는 지금의 국립국악관현악단에 입단하게 되었다.

 

이미지 국립국악관현악단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의

저는 대금연주자로서 수많은 연주 경험과

다채로운 실력향상의 기회를

가지게 됐습니다.

당대 제일가는 최고의 명인들과

공연하는 기회도 많았고, 명인들과의 인연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연과 경험을 통해

저는 국악인으로서 우리 음악의 폭을 넓히고

향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국악관현악단은 활발한 시도와 개방성으로 국악계에 대표적 장르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발전의 또 다른 이면에는 해결해야 할 많은 숙제가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다양한 레퍼토리의 부재와 음악적 사운드를 만들고 끌고 갈 수 있는 지휘자의 역량과 역할, 오랫동안 고정화된 관현악단의 구조적인 시스템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점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중 국악창작곡의 레퍼토리에 있어서 2000년대 중반까지의 국악관현악은 박범훈, 이상규, 백대웅 등 1세대 작곡가들의 시대였다면 이후의 관현악은 ‘창작과 실험’의 과감한 변화를 시도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새로운 젊은 작곡자들의 출연과 동시에 서양음악을 전공한 작곡자들이 국악관현악이라는 장르에 합세하며 국악관현악 레퍼토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했다.

이렇듯이 국악관현악곡은 다양한 변화를 통해 발전한 반면 그 곡을 만들어내고 연주하는 지휘자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부재한 상태였다.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연주자 활동을 하던 문형희는 지휘자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학원에서 지휘를 공부했다.

2008년엔 한강필하모닉 정기연주회를 지휘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에그먼트 서곡’ 서양 오케스트라를 위한 미키 미노루의 가야금 협주곡 ‘소나무’ 베토벤교향곡 4번으로 구성했다. 국악 전공자가 서양클래식 레퍼토리로 지휘를 한다는 건 그 시절 굉장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미지 국립국악관현악단

 

 

국악관현악단을 지휘하는 서양 지휘자들은 많은데

왜 국악을 전공한 국악지휘자는 서양음악을 할 수 없을까?

라는 생각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을 깨고 싶었어요.

 

다소 엉뚱한 발상에서 시작한 문형희의 생각은 그대로 현실로 이어졌고 지금도 국악을 전공한 지휘자가 전곡을 서 레퍼토리로 지휘한 연주회는 흔치 않다.

황병기 예술감독이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이끌던 시절, 문형희는 단체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서양음악 지휘뿐만 아니라 유수 국악관현악단을 지휘한 문형희는 지휘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양한 지휘자가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호흡을 맞출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그의 노력이 지금의 국악관현악단의 음악적 발전으로 연결되었으리라.

지휘자의 꿈을 꾸었던 그는 지휘자로서 다양한 경험과 활동과 동시에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수석연주자와 악장을 역임하면서 대금연주자로서의 본연의 역할 또한 꾸준히 지켜나갔다.

2016년 문형희 대금연주회 ‘서으로 가는길’은 그 해에 이데일리 대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렇듯 문형희는 여러 분야에서 자기의 음악적 역량을 다양하게 소화해내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저는 지금도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집중해야 할 일을 찾고나면

그 일이 이 사회에 특히 우리 음악에

어떤 공익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순간순간 변하는 이 시대에 우리 음악도

변화에 맞춰 과감하게 변화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음악도 실은 과거의 창작 음악이었고

변화와 수용을 통해 하나의 전통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변화에 적극적이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흐름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것 앞뒤 안 가리고

일단 해봅니다. 질보다 양이 많아야

질 좋은 하나라도 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미지 국립국악관현악단

 

세상 모든 것이 다 예측 가능하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헛똑똑이가 많다. 그만큼 세상은 복잡계 속에서 그 질서\를 유지하며 변화해 나간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들뢰즈(Gilles Deleuze)는 노마디즘(nomadism)의 삶을 권한다. 우리가 오랫동안 개념화하고 진리라고 믿고 있는 제한된 가치와 삶의 방식에서 탈피하고 그 삶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바꿔나가는 유목민의 살아가는 삶, 그는 지금 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예술가들은 이 시대의흐름에 맡기며 예술적 삶을 찾아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우리를 만드는 것처럼 지금도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삶의 흐름에 순응하며 자기의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훌륭한 예술가들의 모습을 문형희를 통해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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