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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beautiful and classy life.

특집 - 촛불을 밝히는 민중예술가 임옥상

임옥상 인터뷰

정안수井華水 Freshly Drawn Water 종이부조+아크릴릭 91X61㎝

 

특집 - 촛불을 밝히는 민중예술가
임옥상 LIM OK SANG

 

미술을 통해 알리려 했던 광주!
어떻게 하든지 광주를 표현해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80년 광주는 어떤 말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 자생적이며 좌파적 체제를 띈 사회에 아주 불온한 그림을 그리는 자들로 나쁜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민중이데올로기에 심취된 일군의 작가들로 당시 정치권력으로부터 탄압받던 억압의 시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환경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민주화운동이 더 중요했기에 교수직을 던진 민중미술가 임옥상!

민중예술과 공공미술로 거듭나는 그를 만났다.

 

땅4 地4 The Earth 4 유채 104X177cm 1980

 

광주는 어떤 말도 허락하지 않았다.
좌우대칭의 군더더기 없는 극명한 그림 중간색 등의 쓸데없는 수사가 없는 쨍 소리가 나는 그림.

 

일체의 설명이 없고 그저 입이 쩍 벌어지는 그림.
말로써 어떤 진실이나 사실을 주고받을 수 없는 극한으로 내몰렸을 때, 그림은 말보다 의사소통의 방법으로 더 주효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림은 말보다 함축적이고 말보다 들키지 않고 말보다 더 깊게 확연히 서로의 가슴을 공유할 수 있다. 80년 광주는 어떤 말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무3 木3 Tree 3, 유채 121X208㎝, 1980
 

1980년의 나무

 

나무가
하늘을 뚫을 것인가.
구름이 나무를 삼킨 것인가.

 

그렇다.
1980년은 분명
역천[逆天] 의 역사였다.
 

현실을 발언하는 그림
 

1979년 ‘현실과 발언’ 동인의 창립은 내 그림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림문제를 사회와의 소통에 관한 것으 로 집약하면서 미술의 이러한 역할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웠다. 미술의 소통에 관한 문제를 구조적으로 살피기 시작하면서 미술에 들씌워졌던 베일을 걷고, 신비 순수 환상 자유 영원 등을 가차 없이 버렸다.

 

현실을 직시하고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은유와 상징에다 직선적이고 구체적인 리얼리즘의 시각을 첨가하였다. 일상의 문제가 급부상하면서 주도면밀하게 모든 것이 닫힌 이런 사회에서는 미술이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 언론매체의 역할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우민정책과 통제 정책에 짓눌려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이것이 게릴라전이 되었든 테러가 되었든 ‘진실’을 알려야 할 사명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나는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에 붓을 들어 현실에 맞섰다.

 

출처-임옥상. 벽없는 미술관 벽을 넘어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하여
1970~2000.에피파니

 

사진 공공디자인 저널 편집부

 

민중예술가 임옥상작가를 찾아서

 

임옥상작가를 처음 만났던 곳은 지금부터 31년 전인 5·18 당시 헬기 사격 탄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광주광역시 전일빌딩 3층 남봉미술관이었다.

 

1988년 군 전역후 집안형편으로 바로 복학하지 못한 채 미치도록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임옥상작가는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리시대풍경과 우리시대의 초상, 마을 풍경의 작품들로 파격적인 색감과 보도사진 같은 뉴스를 화폭에 담아내 젊은 우리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사계절의 마을 풍경과 시골길가에 내걸린 간판도 인상적이었다. 새마을운동 모자를 쓴 농민, 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경직된 모습으로 서있던 작품들이 생각난다.

 

과격하거나 선동적이지 않으면서도 전달하는 바가 있고 직설적이지 않으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고 사진 같은 기록성 이미지를 내포하며 민중미술을 실천하던 작가 임옥상

 

광주 민주화운동 39주년을 맞이하며 임옥상 작가를 찾게 된 이유이다.
1980년대 임옥상작가의 작품 속에 녹아있는 못다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편집인
 

사진 공공디자인저널 편집부

 

정희정. 전시회 하실 때마다 여러 작가들 그리고 화가 지망생들이었던 당시의 미술대학 학생들과 격식 없는 대화를 나누셨던 작가님이 기억납니다. 물론 그 학생 중에 필자 또한 있었습니다.
 

당시 전시회 오픈식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작가님의 담론은 꽤 심도가 깊고 열린 대화들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1980년 민중미술가로 회화의 한
획을 만드셨는데 민중미술에 대한 회고를 부탁합니다. 당시 어떤 의미전달을 위하여 그러한 작품 활동을 하셨는지요?

 

임옥상. 표현의 자유가 없던 시절 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 그 이후에도 극악한 전두환체계로 이어지며 표현의 억압. 표현의 불가능 시대로 살아갔던 작가들... 대학 졸업 후 작가의 방향에 있어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이 전혀 없는 학생에서 사회로 아무런 희망 없이 던져져 버려진 느낌... 이 국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사회인이 되었다. 그래도 뭔가는 해야될 거 같았다. 그래도 전공이 미술이니까 그림을...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고 그래서 삽과 곡괭이를 들고 산야를 헤맸다. 내가 발 딛고 있는 대지에서 캔버스 대신 뭔가 ‘짓거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절체절명의 상황속에서 뭔가 시작은 했는데 너무 너무 어려운...그림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공포를 느꼈다. 당시에는 막걸리 반공법이라고 말했던, 막걸리 마시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잡혀 들어가던 시기였다.
 

땅2 地2 The Earth 2, 먹+아크릴릭+유채, 135ㅌX350㎝ 1981
 

저들의 놀라운 ‘안보적 상상력’

 

[조선일보]는 ‘조선’이란 말을 써도 관계없다.
귀빈을 모시기 위해 펼친 붉은 카펫은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노동자가 두른 붉은 머리띠는 위험하고,

 

내가 칠한 붉은 황토색은 ‘좌경 용공’이 된단 말인가.
붉은색을 많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이 작품은 압류되고
나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저들의 ‘안보적 상상력’을 누가 말리겠는가.

 

우리 시대 풍경-농촌 我們 時代風景-農村 Scanery of Times-Rural Area,유채,140X218㎝ 1984
 

전 국민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박정희가 영구집권하기 위해 헌법까지도 바꾸었으니까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전 국민을 공작원처럼 훈련을 시켜서 조금만 이상한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고 사라졌던 시절이었다.

 

농사를 지을 수도 그림을 그릴 수도 없던 시절...그래서 다시 야산에서 들판에서 생각했던 것들을 캠퍼스에 옮겨보기 시작했던 것들이 초기의 제 작품들이고 그 작품들이 의외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많이 주었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시대상황의 메시지를 담을 수 없는 시대였으니... 어떡하든지 피하면서 살아야 하니까... 그림 몇 장 그리다가 붙잡혀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이런식으로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산에... 말뚝 박기...산불놓기...
어떻게 하든지 광주를 표현해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을 하면서 사회에 그림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서정과 은유로 당시 시대상황을 표현하려고 했었다. 좀 더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강도를 피해 나아 보인 듯 했지만 사실은 강도가 더 강했다.


어려서부터 낙서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것은 벽을 관리하는 것이다. 민중이 아무 말이나 하면 안된다는 것으로 일제가 특히 신경썼던 일반사람끼리 소통하는 잘 모르는 방법, 익명으로 소통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

 

박정희 독재때도 그 전통을 이어받아서 사람들을 역시 관리하려고 했다.
 

이후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왔으나 몇몇 작품은 뺏기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심과 회유 공갈을 들어오면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84년 프랑스로 2년 동안 유학을 갔다 돌아와보니 엄청난 억압이 있었다. 이후 작품 활동이 소강상태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약간 민주화 운동이 기울어 들 때가 1988년 이었는데 그때 프랑스에서 그렸던 아프리카 현대사 작품들이 주목의 대상이 되고 1991년 전주대학교 교수직을 자의에 의하여 접었다. 교수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학생들 가르치는 것보다 내겐민주화운동이 더 중요했다.


당시는 수업을 제대로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1991년 호암갤러리에서 한 전시를 통해 내 길은 예술의 길이다 다짐하고 학교의 사직을 결정했다.

 

당시 개인이든 사회든 폭포를 따라 흐르는 게 아니라... 폭포를 예술은 거슬러 올라가야 했는데 그때 당시 예술가는 시대상황에 따라 흐르고 있었고 정치권력에 순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항하거나 저항하는 예술가들이 없었다.

 

단색화라고 일컬었던 예술권력, 문화 권력이 있었다. 그러한 권력 앞에 자유롭기가 어려웠고 표현의 시대는 끝났다고 절망하기도 했었다. 한국적 민주주의, 한국적 미학, 한국미술의 본질을 왜곡한 단색화에 순응하지 못하면 대학교수나 작가로 성장하기가 어려웠던 시절.

 

나는 시녀가 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수직을 버리고 나왔다.
 

정희정. 교수님이 기억하시는 1980년 5월 그리고 80~9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광주 민주화 운동과 민중미술의 시대상황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십시오!

 

임옥상. 당시 광주교육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광주를 표현해야 했었고 미술을 통해 광주를 알려야 했었다. 예술의 자유를 써가고, 자유롭게 작업을 하려고 예술의 자유를 가로 막는 것이 정치이고 권력이다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술과 정치가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권력과 부딪히게 된 것이지 우리가 민중미술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85년도에 정부가 마치 유대인에게 별을 붙이듯이 경고와 긴급경보를 발령한다.
 

해바라기 葵 Sunflower, 천+유채+아크릴릭, 113X163㎝ 1980
 

신새벽,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는 희망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밖의 동정부터 살핀다.
지난밤에 무슨 일은 없었는가, 내 두 눈으로 직접 살핀다.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전두환의 벽보로 뒤덮인 가난한 집의 벽, 철조망으로 막은
배타적인 담 안쪽에 그래도 해바라기는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민중미술이 나타났다.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나타났는데 사회에 위험한 민중미술이 나타났다. 우리들은 ‘민중미술’? 이게 뭐야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멋있는데!, 그렇다면 민중
미술이라고 하자. 이렇게 민중미술은 우리들이 주장하고 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이런 그림을 그리는 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자생적이며 좌파적 적색체제를 띈 사회에 아주 불온한 그림을 그리는 자들이다. 나쁜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민중이데올로기에 심취된 일군의 작가들이 민중미술작가들이라고 정부가 명명한 것이다. 그물 속에 넣고 관리하려 했던 것이다. 1985년부터 민중미술이 명명되었다. 일반인들에게는 86년부터 알려지게 되었는데 과격하게 선동하고 폭력도자행하는 자들로 정보당국이나 보수언론에서는 매우 좋은 빌미가 된 것이다. 민중미술을 하는 자들은 모두가 사회악으로 취급하며 민중 미술의 좋은 취지는 간데없고 폭력적이며 문제가 많은 보편성이 부족한 미학이고 미술사조였다 라고 치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정권이 바뀌고 김대중, 노무현 시대는 비교적 순탄했으나 한편으로는 역차별의 대접을 받기도 했었다. 민중미술이후 포스트민중미술이 대거 등장하게 되는데 순수중심의 자기들 방식으로 새로운 미디어환경, 새롭게 바뀐 정치 지형지도와 세계의 변화를 담아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만약 민중미술이 없었다면 오늘의 미술이 이렇게 되어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술의 지평을 넓혀준 것이 바로 민중미술이다.
 

정희정.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시며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임옥상. 기본줄기와 큰 변화가 없다. 사회 속의 미술이지 사회 밖의 미술은 아니다. 그리고 미술은 내 개인의 것만이 아니다. 그 시대에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서 동료의식을 갖고 같이 그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전제하에서 그림은 똑같이 그릴 수 없으니까 90년대 말 IMF이후부터 공공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미술이 사적소유가 되면 일반사람들이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고 일반인들은 보기가 어렵게 된다. 일반인들은 미술관과 화랑을 찾는 여건과 기회가 많지 않다. 그렇게 되면 일반인들이 미술로부터 무관심하게 되는 것을 방치하는 셈이 된다. 그림을 모르는 일반인도, 불특정 다수도 여기저기서 우연히 접할 수 있는 미쳐 생각지 못했던 이런것도 가능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도록 개방된 공공장소에 작품이 만들어지고 세워져야
한다. 그런데 특정장소에 세워진 작품들의 작가들은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권력에 타협하고 제한적으로 ‘손대지마시오’, ‘들어가지 마시오’ 같은 통제를 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공공미술에서는 고압적 태도를 버려야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공미술이 작가 중심적이므로 근래에는 커뮤니티아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역 미술 즉, 주민과 같이 만드는 어떤 미술이 됐으면 좋겠다. 주민이 한 단계 올라와야 대화가 된다. 또한 생활예술에 관심이 많다. 일반사람들이 너무나 생활에 내몰리고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경제 지향적 삶에서 벗어나 예술적 향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가치와 자기의 존엄을 발견해 내고자 하는 기풍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생활예술에 관심을 두고 있다.

 

누워서 하늘을 보라 ‘당신도 예술가’ 거리 미술 이벤트 臥看天 ‘你也是 藝術家’ 街美術 Look at the Sky ‘You are an artist’ Project 2000
 

31년 전의 과거로부터 불쑥 찾아든 필자를 반겼다. 점심을 함께하고 고즈넉한 커피숍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교감을 넉넉히 나누었다. 31년 전 젊은 임옥상보다 눈동자는 더욱 반짝였고 작업실의 작품들도 기운생동[氣韻生動]했다. 우연이었을까? 그를 만나 인터뷰한 날이 4.19 일이었다.
-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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