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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세가지 쟁점

우리에게 포스트 코로나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인가?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서울대 전 통일평화연구원장 ​ 저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국제연대』, 공저, 한울, 2018 『평화를 위한 끝없는 도전』공저, 북로그컴퍼니, 2018 『소련형 대학의 형성과 해체』공저, 진인진, 2018 『냉전의 섬 금문도의 재탄생』, 공저, 진인진, 2016 외 다수 출처 - 다산연구소 코로나 19의 세계적인 대유행이 시작된 지 석 달째로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는 이제 범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하고 생활방역으로 조금씩 전환하고 있다. 비록 관중 입장은 허용되지 않지만 프로 야구가 무관중 경기로 개막되었고,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이를 중계하고 있다. ​ 고3 수험생들부터 학교 수업을 정상화할 것을 결정하였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고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안이 시급하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전 국민 고용보험제도의 도입을 약속했다. ​ 과연 우리에게 포스트 코로나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인가? ​ ​ 방심하다가는 큰 낭패 ​ 세계적인 대유행의 상황을 분석해보면, 중국에서 코로나 19가 유행하던 시기에 상대적으로 느긋하게 생각했던 선진국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이탈리아와 스페인보다 늦게 대유행을 겪고 있는 영국이 최대 피해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근대의 문명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복지국가 모델의 실패를 거론하기도 한다. ​ 아시아에서도 방역 모범국으로 간주되다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싱가폴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싱가폴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자국민 방역은 성공했으나 기숙사에서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관리가 소홀했기 때문에 낭패를 보고 있다. ​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아시아 아프리카 개발도상국들의 상황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것은 자신들에게 충분한 의료역량이 없음을 인정하고 일찍부터 높은 수준의 통제를 실시한 덕분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지난 주말 서울의 교통 사정은 코로나 사태가 있기 전의 ‘불금’처럼 몹시 혼잡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달만에 이태원 클럽이 새로운 집단감염의 현장이 되었고, 소수자 혐오를 동반한 고질적 인권침해가 논란이 되었다. ​ 범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된 지 한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켜진 경고등이다. 외국의 언론들은 방역 모범국인 한국이 경제 재개와 바이러스 차단 사이에서 그리고 인권과의 균형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논평했다. ​ 재난 책임 ​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이 자연재해인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국제적인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이것을 자연재해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지만, 세계 최대 피해국인 미국은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의 원천을 중국으로 지목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대유행의 책임을 지속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영국도 이에 동조하고 있고, 세계보건기구가 중국에 경도되었다는 비판에는 독일도 동조하고 나섰다. ​ 중국은 오히려 많은 나라들에 대한 지원 공세를 취하고 있어서 세계적인 협력보다는 국제적인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농후하다. 이런 중국 책임론의 끝은 어디일까? 코로나의 역설은 치료 약 개발을 위한 전쟁뿐 아니라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을 제고시키고 있다. 우리는 미·중간 헤게모니 경쟁에서 의연해야 할 뿐 아니라 가장 취약한 고리에서 발생할 수 있는 국지적 분쟁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 새로운 표준 ​ 코로나 바이러스 피해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세계는 이제 코로나 이전(BC)와 코로나 이후(AC)로 나뉠 것이라는 예측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코로나 확산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서 그런 비유가 상당히 과장된 것이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과거로 회귀하는 경향이 확연해지고 있다. ​ 하루라도 빨리 정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경제주의적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데 비해, 코로나 시대를 맞아 새롭게 부상하는 뉴 노멀(New Normal)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세계관으로는 반복되는 대규모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 뉴 노멀이 과연 생태주의일지 새로운 공동체주의일지 알 수 없지만, 앞으로의 세계가 기존의 정상과 새로운 정상 간의 사회철학적 투쟁의 장이 될 것은 틀림없다. 우리는 이런 쟁점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고 있는가? 세계는 한국이 가는 길을 주시하고 있다. ​

취임부터 간소하게 - 1편 부임 赴任

다산 정약용의 눈높이로 본 한국 지방자치의 현장고백서

정영오 ​ 행정학 박사 청렴연수원 청렴교육강사 前)함평군 기획감사실장 취임부터 간소하게 ​ 21세기 지방자치단체장의 취임식장은 과거 취임식장과는 백팔십도 달라져야 한다. 축하 화분도 딱 두 개면 충분하다. 의회에서 의원 일동이 보낸 것과 공무원노동조합에서 직원 일동이 보낸 것이다. 취임식 장소는 민의의 전당이라고 하는 시의회의 의사당이 좋다. 주민의 대표 기관인 의회에서 취임선서를 하는 것은 시민 모두에게 선서한 내용을 지키겠다는 약속과 다짐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 취임선서는 중앙정부에서 제시한 일률적인 내용보다 지역 실정과 지방자치단체장 자신의 소신이 담겨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선서, 나는 헌법에서 표방한 지방분권 국가인 대한민국의 지방정부 책임자로서 주민의 복리증진 및 지역사회의 발전과 국가시책의 구현을 위하여 ○○시장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년 7월 1일 ○○시장 ○○○.” ​ 다산이 시장으로 취임한다면 취임사의 내용은 과거 자신이『목민심서』에서 늘 강조했던 것처럼, 시민에게 이익이 되고 시민을 편안하게 하는 위민爲民, 시민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애민愛民, 부패하고 적폐가 쌓여 흐트러진 지방을 바꾸어 보자는 혁신革新, 공직자들이 지향해야 할 기본적인 임무인 공렴公廉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다. ​ 『목민심서』는 “신임 사또는 부임 행장부터 검소해야 함”을 강조한다. 즉, “의복과 말의 안장도 있는 그대로 써야지 새로 마련해서는 안 된다” 1)는 것이다. ​ 다산은 이를 설명하면서 ​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아껴 쓰는 데 있고, 아껴 쓰는 근본은 검소함에 있다. 검소해야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해야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함이야말로 목민함에 있어 제일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 어리석은 자는 산뜻한 옷에 좋은 갓을 쓰고 멋진 말을 타는 것으로 위풍을 떨치려고 한다. 노련한 아전들은 신임 수령의 행장을 보고 판단한다. ​ 만약 사치스럽고 화려하면 비웃으며 ‘알 만하다’ 하고, 검소하고 단출하면 ‘두렵다’라고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수령은 남들이 부러워한다고 착각하지만, 부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미워한다. 재산을 축내면서 명예를 손상시키고 미움까지 받게 되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라고 강조한다. 1)『牧民心書(목민심서)』 제1부 赴任(부임)편 제2조 治裝(치장)의 “治裝(치장), 其衣服鞍馬(기의복안마), 竝因其舊(병인기구), 不可新也(불가신야)”라는 글이다. ​ 선거로 취임하는 오늘날 자치단체장들의 경우는 어떤가. 당선 때부터 거창하다. 선거사무소에는 당선 축하 화환과 화분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공식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는 취임식은 가관이 아니다. 멋진 새 양복과 한복을 차려입은 지방자치단체장 내외는 단연 번들거린다. 지역에서 가장 큰 예술회관이나 체육관에는 수천 명의 주민이 초청되어 초만원을 이룬다. 취임식장 초입은 물론 행사장 안을 빙 둘러 빈틈없이 들어선 화환과 화분은 놀라움에 앞서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방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출마 선언과 출판기념회에 동원되는 선량한 주민들이 부담하는 책값 명목의 경비는 아마 수천만 원에 서 수억 원에 이를 것이다. 이 모두가 체면을 이기지 못한 주민들의 고혈膏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선생은 임금이 하사하지 않았는데 고급 수레를 마음대로 타는 고을의 수령을 꾸짖는다. 당시 쌍마교雙馬轎(말 두필이 매는 가마)와 유옥교有屋轎(지붕이 있는 가마)는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면 탈 수 없었다. “요즈음 하찮은 고을의 수령도 유옥교를 타고 나라의 법을 함부로 어기면서 제멋대로 부귀와 영화를 뽐낸다. 나라의 기강과 법제가 이에 이르렀다”고 검소하지 못한 목민관들을 꾸짖는다. ​ 선거로 취임하는 선출직 목민관들은 어떠한가. 지방자치단체장이 사용하는 소위 1호차는 지방자치단체의 ‘관용차량관리규칙’에 의하여 운영된다. 시장·군수·구청장과 의회의장에게는 대형 승용차를 전용으로 배정한다. 대형 승용차는 배기량 2,000cc 이상의 차량이라고 폭넓게 규정하고 있다. 차량의 내구연수에 있어서도 7년을 경과하고 주행거리 12만 km를 초과한 경우에 새로 구입할 수 있도록 헐겁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떤 자치단체도 2,000cc 자동차를 타는 자치단체장은 없을 것이다. 내구연한을 불문하고 옆 자치단체의 군수는 3,000cc ○○자동차를 타는데 우리 시장은 더 크고 좋은 차를 타야지 하면서 앞다투어 더 큰 차 타기 경쟁을 한다. ​ 다산은 신영新迎(수령을 새로 맞이하는 것)의 예절 가운데, 아사衙舍(관아의 중심 건물로 수령이 거처하는 집)를 수리하는 폐단이 있다고 지적한다. “아사를 수리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백성을 부려야 함으로 부임한 뒤에 판단할 일이다”라고 재정의 절용을 솔선하고 낭비의 폐단을 개선할 것을 지적한다. ​ 요즘 자치단체장들은 관사를 없애고 사택을 많이 이용하는 추세이나 아직도 관사를 이용하는 지역이 상당하다. 현 자치단체장이 연임하는 경우에는 임기 동안 수리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자치단체장이 새로 취임하는 곳에서는 관사를 수리하고 꾸미느라 야단법석이다. ​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새로운 목민관을 맞이하는 예절이라고는 하지만, 불필요한 시설 공사는 물론이고 아직 쓸 만한 가전제품과 가구 등을 온통 교체하여 재정을 낭비하는 경우도 많다. ​ 지방자치단체의 ‘공유재산 관리 조례’에 의하면 ‘관사의 운영비는 사용자가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자치단체는 그 원칙을 벗어나 건물 수선비, 화재 보험료, 냉난방비, 가전제품 및 장식물 구입비, 전기 요금, 전화 요금, 수도 요금 등 모든 운영비를 지방자치단체 예산으로 부담하고 있다. ​ 이와 같은 지방자치단체장의 행장들은『목민심서』에서 강조한 “관직을 제수 받은 초기부터 재정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2)는 다산의 가르침이 무색할 정도이다. 2)『牧民心書(목민심서)』 제1부 赴任(부임)편 제1조 除拜(제배)에서 “除拜之初(제배지초), 財不可濫施也(재불가남시야)”라 쓰고 있다. ​ ​

도시디자인이 사람의 도시를 만든다 - 5편 도시디자인의 역할과 수법론

조용준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칼럼

도시디자인이 ‘사람의 도시’를 만든다 5편-개별성 도시로써 근대도시 ​ 조 용 준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 前)광주광역시도시공사 사장 前)한국주거학회장 前)한국도시설계학회 부회장 前)중앙도시계획위원 도시디자인의 역활과 대상 도시디자인의 다양한 역할론 ​ 도쿄대학은 1963년 펜실베니아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 이어 3번째로, 3개 강좌로 이뤄진 도시공학과를 개설했다. 이 중 제2강좌가 도시설계 강좌(이후 도시디자인 강좌로 변경)다. 이 강좌는 건축학과 교수이자 세계적 건축가인 겐조 단게가 책임을 맡았고, 그의 정년 후에는 후임교수들이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 이는 일본대학의 독특한 체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도시디자인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일본이 세계 도시디자인의 한 축을 담당했던 나라라는 점을 감안하면, 긴 세월동안 이어져온 강좌는 도시 디자인 역사에서도 눈여겨 볼 만하다. ​ 겐조 단게는 도시 분석의 실마리로 시작한 도시계획은 도시규제 수단으로써 조닝기술을 개발해 계획의 수량화를 꾀하면서 토지이용의 큰 개요를 만들었지만, 수단을 목적으로 잘못보는 위험성과 함께 ‘도시다움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하는 문제에서는 벗어나있다고 지적하며, 도시디자인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 그는 도시디자인의 역할을 건축과 도시를 성장·변화하는 유기체로 인식하고, 이들이 융화적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양자 관계의 긴밀한 연결을 통해 건축이 도시적 확장을 하고, 도시도 공간적 개념을 풍부하게 하면서 새로운 공간질서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 이미지 항구를 가까이 느끼게 하는 축으로써 일본대로, 요코하마는 역사를 살리는 길 만들기, 사람친화적 길 만들기, 활기창물의 무대라는 주제로 차도를 줄이고 인도를 확장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출처-전요코하마 도시디자인 실장 구니요시 나오유끼) 이는 도시디자인이 도시계획과 건축 디자인의 분리 아래 각각의 계획 이론을 높이면서 나타난 도시적 과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해야 함을 분명히 한 것이다. 두 번째로 강좌를 맡은 건축가 오타니 유키오 교수 역시, 도시 디자인 역할을 “근대도시계획이 개발한 추상화, 수량화의 의미와 방법을 받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건축 디자인의 형상화 이론과 방법을 보다 광범위한 전개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 세 번째로 강좌를 맡은 와다나베 사토오 교수는 “도시계획은 건축, 토목구조물, 조경, 공예와 같은 구체적 기술과 예술 수단을 통하여 실현되는데, 이 과정에서 형태(공간, 형태, 구성, 경우에 따라서는 의장)의 권리를 조정하고 종합하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설명했다. 같은 흐름이지만 전임 교수들이 건축과 도시의 관계를 구조주의 관점에 두었다면, 와다나베 교수는 “도시계획 실현으로써 도시정비사업, 역사와 전통의 물리적 측면에서 보존과 계승, 도시디자인의 수법으로써 도시공간의 형태 평가” 등 생활 밀착형 공간디자인에 더 많은 관점을 두었다. ​ 이 과정에서 경관문제도 한 축으로 등장했는데, 당시 같은 강좌의 야마다 가쿠 교수는 경관문제를 “통제와 무위, 풍토에 순응과 도전 사이의 문제”라고 언급하면서 “무위방임과 형성노력, 단일목표와 다수목표, 유럽지상주의와 민족주의, 신경관 지향형과 현존 또는 과거 경관 지향, 총체주의와 분석주의 사이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무렵 필자는 이 연구실에서 1년간 있었는데, 역사환경의 보존과 계승, 생활 친밀형의 공공 공간에 관점을 둔 연구가 많았다. 이미지 구, 요코하마 선거 제2호독, 일본에서 가장 먼저 도시디자인을 시행한 요코하마는 아카렌가 창고, 구 요코하마 쇼킨 은행 등을 보존, 활용에 힘썼다. 도시 디자인의 대상과 범위론 ​ 도시디자인은 도시를 통합적으로 보는 것을 기본관점으로 하는데, 그 대상은 도시 전체에서부터 부분까지 다양하다. ​ 일본에서 도시설계 연구소를 운영하던 구라타 나오미치는 도시디자인의 대상과 범위를 대규모 건축으로서 도시디자인, 건축집합체로서 도시디자인, 가로경관으로서 도시디자인. 공공공간 정비로서 도시디자인, 도시비전으로서 도시디자인, 도시구조로서 도시디자인, 도시정책으로서 도시디자인, 도시비평으로서 도시디자인으로 규정했다. ​ 1992년 요코하마에서 개최된 세계 도시디자인 포럼은 “도시정책 골격과 관련을 갖는다. 도시디자인 질서를 디자인한다. 도심을 사람이 거주하는 다양한 장소로 디자인한다. 역사적 문맥을 더듬어서 도시 개성을 발굴한다. 도시문화를 디자인한다. 생태계와 공존을 모색한다. 촉매로서 프로세스 디자인을 수립한다. 비공식 플랜에 의한 합의형성과 유도를 도모한다. 공식리듬을 전략화한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도시디자인이 물리적 형상만이 아닌 도시정책, 역사, 문화, 생태, 수법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오늘날 세계적 도시디자인 도시로 평가 받고 있는 요코하마는 “보행활동을 보호하고, 안전하고 쾌적한 보행환경을 확보한다. 지역의 역사적 문화적자산을 소중히 한다.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장소와 커뮤니케이션의 장을 증대한다. 형태적 시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지역의 지형이나 식생 등의 지역적 특성을 소중히 한다. 오픈스페이스나 녹지를 풍부하게 조성한다. 바다나 하천의 수변공간을 소중히 한다”라고 생활 친밀형 도시공간 디자인의 실현을 구체화했다. 오늘날 요코하마가 ‘사람의 도시’로 불리는 데는 바로 이같은 지속적인 도시디자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요코하마를 걸어보면 렌 긴도로즈 말처럼 도시디자인이 도시공간과 관련된 서로 다른 수많은 조각(대상)을 모아서 하나의 장소를 만들어가는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는 공공 디자인도 포함된다. 공공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외국 도시공간 디자인에서는 들어본 기억이 없지만, 우리 행정에서는 상당히 정착된 용어다. 넓은 의미로는 공공에서 관여하는 건축물이나 토목 등을 비롯해 가로시설물, 교통 안내판, 가로등, 바닥 포장, 간판 등을 포함하기도 하고, 좁은 의미로는 가로 시설물, 교통 안내판 등으로 한정하는 것 같다.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공공 디자인이 도시공간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도시 디자인이다. 그렇지 않으면 과도한 디자인이 될 수도 있고, 도시를 혼란스럽게도 할 수 있다. 요코하마가 도시공간 등에 시설물의 종류와 양이 많아지면서 토탈 디자인을 모색한 것도 그 때문이다. ​ 도시디자인의 관점과 수법론 도시디자인의 관점 ​ 도시공간은 과거의 축적이고 우리들은 거기에서 생활하지만, 생활양식의 변화, 경제 수준의 향상, 기술의 발달로 항상 새로운 도시공간으로의 변화를 바라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유도·제어할 것인가가 중요한데, 도시디자인은 여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 도시디자인 실현에는 도시정책, 공공과 민간의 역할과 개발규정, 제도운영, 자금조달 등과의 연계는 물론, 합의형성이 필요하다. 또 상황이 변화되면 도시디자인의 관점과 대상, 수법도 바뀌어야 하고, 도시디자인 실현에도 긴 시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다른 분야 디자인과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요코하마가 협의형 도시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 필자가 초청 받았던 2014년 ‘요코하마 도시만들기-도시디자인 20인의 증언’에서 요코하마 시립대학교 스즈키 노부하라 교수는 요코하마의 40년간 도시디자인을 “암묵지로써 도시디자인, 토지이용 컨트롤과 도시디자인, 도시정책의 이벤트로써 역할이었다”고 규정했다. 도시디자인의 정의는 시대상황에 따라서 변화된다는 의미이다. 이미지 구 니혼교우가 바샤마지 빌딩, 요코하마 비샤미찌 거리에 있는 이 건물은 '요코하마 다움'을 만드는 역사적 경관 보존을 목적으로 한 1호 인증 건물이다. 네번째로 도쿄대학 도시디자인 강좌를 맡은 니시므로 유키오 교수는 “도시디자인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이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실체로 귀결되는 공간 조직을 목표로 해서 최종 성과물을 이미지화하면서 그것이 초래하는 형이상적 의미나 계산을 넣는 것이 필요하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도시의 부분 디자인이기 때문에 다른 부분과 상대적 관계에서 기능한다. ​ 도시디자인은 예술가의 사념 속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도시디자인을 실현시키는 과정에는 도시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이 있다. 도시디자인은 도시생활자가 이용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도시 생활자의 지지를 받지 못한 디자인은 그것이 설령 어떤 예술적 가치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높이 평가될 수는 없다. 도시디자인은 짧은 기간에 완성될 수 없는 디자인이다” 라고 강조했다. ​ 이미지 개항의 길 일부, 1911년 개설되어서 1985년까지 기차가 다니던 임해부 철도를 중심으로 한 1.2킬로미터 보행로는 건물과 연동하여 개설되었다. ​ 일본에서 도시디자인은 늘 긴 기간을 상정한다. 그래서 실현성을 갖는다. 우리 도시들처럼 지자체장의 임기 동안에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실질적 실현은 어렵다. ​ 그가 도시디자인을 점적인 스폿트 도면을 통하여 디자인하는 스폿트 디자인, 복수의 사업자나 권리자가 복잡하게 얽힌 프로젝트 디자인, 결과물 중심의 아웃 풋트 디자인, 시민참여를 통한 과정 중심의 디자인인 프로세스 디자인은 물론, 컨트롤 디자인으로 구분한 것도 바로 실현 기간과 대상의 관련성에 기인한다. ​ 도시디자인의 수법론 ​ ⓐ 하드적 도시 디자인과 소프트적 도시 디자인 도시디자인은 스스로 최종적인 물적 디자인을 하는 하드 도시디자인과 다른 사람의 디자인 행위를 간접적으로 컨트롤하는 소프트 도시디자인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전자를 환경디자인, 후자를 매니지먼트 디자인이라고도 한다. 환경디자인은 광장, 녹지와 공원, 수변 등과 같이 소유자가 같고, 설계자가 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 매니지먼트 디자인은 택지개발지구, 가로공간, 가로건축군, 상점가 등 소유자와 설계자가 각기 다를 경우에 가이드 라인이나 메뉴얼 등을 통해서 개별건축 디자인을 컨트롤하는 것으로써, 대표적인 공법상 제도가 지구단위계획이다. ​ ⓑ 도시디자인과 총괄건축가 (M.A) 건축과 도시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만약 각자가 자유롭게 건축하도록 할 경우, 도시는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에 이를 통일적으로 해석하는 디자인 가이드라인이나 메뉴얼이 필요하다. 그러나 디자인은 아주 섬세하고,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어 언어적 표현에는 한계가 있다. ​ 따라서 도시디자인 률을 해석하고, 컨트롤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이들을 마스터 아키텍트(M.A·총괄 건축가), 또는 프로듀서, 코디네이터 등으로 부른다. 일본에서 M.A 제도의 선두적 공헌을 했던 건축가이자 교토대학의 우치이 교수는 프로듀서를 마스터 아키텍트(M.A)로, 개별부지 건축가를 블록 건축가(B.A)로 규정했다. ​ 필자가 교토대학에 잠시 있을 때 그는 도시개발에서 M.A 중요성을 사례들을 통하여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쭈꾸바 대학의 이전 계획을 총괄했던 도히 교수는 MA와 BA의 관계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 건축가이자 도쿄대학 건축학과 교수인 구마 겐고는 필자가 번역한 책 ‘건축-마찌나미 경관 창조’에서 “프로듀서에게는 도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충분한 교양과 식견이 있어야 하고,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현대적 다양한 조건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그는 또 “도시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해 속에서 도시 또는 가로경관의 고유성을 재정의하는 것이 프로듀서에게 기대되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프로듀서는 단순한 조정자가 아니라 건축가 개발업자, 주민 등을 납득시키는 설득력이 있고, 도시 고유성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 실체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찰과 분쟁을 조정하고, 사회적 경제적 문제도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탁월한 이론가인 동시 실무가다. ​ 그는 건축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리더가 탁월한 이론과 비전, 실행력, 합의 형성 능력을 모두 갖춰야 하는데, 현재와 같이 복잡한 상황에서는 한 사람의 프로듀서가 양쪽의 자질을 겸비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팀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 지금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M.A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자기중심적 사고를 이입시키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행정은 뒷받침을 잘 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는 게 필요하다. ​ 총괄 건축가의 책무는 건전한 개체가 모인 사회가 곧 건전한 전체 사회가 된다는 논리의 실현이다. 이를 위해서는 총괄 건축가의 명확한 비전은 물론, 행정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을 위한 도시디자인이 된다.

재난을 극복할 '권분(勸分) 운동’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칼럼

『목민심서』는 역시 위대한 책입니다. 200년 전에 다산은 ‘코로나’의 위기를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재난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해야 그런 위기를 제대로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뛰어난 대책을 제시하였습니다. 『목민심서』「진황(賑荒)」편에는 바로 그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열거해놓았습니다. 한재(旱災)나 수재(水災)로 인한 흉년으로 온갖 고충을 당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대책이며, 전염병이 창궐하여 인간의 목숨이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때를 당해서 국가나 지방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하고, 어떤 방법을 강구해야 하느냐에 대한 사려깊은 대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는, 전 인류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대재앙을 맞았습니다. 목숨이 두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온 세계의 경제가 대위기를 맞았습니다. 개인의 삶이 붕괴되는가 하면 중소상공인이나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경제가 파탄에 이르는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목숨도 살려내야 하지만 경제도 살려내야 합니다. 국가나 지방정부는 참으로 공심으로 돌아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온갖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때를 맞았습니다. 세상만사는 언제나 때가 중요합니다. 실기하지 않고 바로바로 특단의 구제책을 강구해야만 합니다. 취할 수 있는 온갖 조치를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이러한 재난의 극복은 정부나 지방정부의 힘만으로 완전하게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때야말로 온 국민이, 온 인류가 단합된 마음으로 인간을 구제하는 대동(大同)의 정신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다산은 진황편에 권분(勸分)이라는 조항을 두어, 재난을 당하면 부유한 사람들에게 권장하여 절량농민을 구제하기 위한 곡식이나 재물을 내놓거나 직접 나누어 주도록 하는 권분정책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누기를 권장하는 의미에서 ‘권분’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권분이 다산이 창안한 내용도 아닙니다. “권분하는 법은 멀리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라고 말해 인류의 지혜는 고대부터 나눠 먹는 높은 도덕률을 알아냈다고 했습니다.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리자, 역시 우리 국민은 대단한 도덕성을 발휘할 줄 알았습니다. 의료인들이 자발적으로 의료봉사의 길을 택했으며, ‘달빛동맹’이라는 멋진 용어대로 광주 시민들이 대구를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고통을 함께 나누자면서 어려운 지방에 온갖 물품을 기부하기도 하는 선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례가 이어졌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는 ‘권분운동’을 실천하자는 운동까지 일어나고 있다니, 이만하면 우리 국민의 수준은 대단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게 해줍니다. 다산은 그때에도 기부받은 물품의 분배에 행여라도 부정과 비리가 개재되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를 했는데, 그런 일은 지금에도 유효한 권고입니다. 남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라도 되듯 엉뚱한 짓으로 국민을 분노케 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 돕고 나눠서 위기를 극복하자는 때,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같은 단체는 위기 극복 방법으로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경영상 해고 요건완화’ ‘경영인 경제 범죄에 대한 가중처벌 기준완화’를 정부에 요구했다는 보도는 우리를 참으로 실망케 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틈에 자신들의 이익이나 극대화하겠다는 생각이니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 표현으로 그들의 태도를 비난함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다산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라도 서로 돕고 서로 나누는 권분의 운동에 동참해야만 합니다.

도시디자인이 사람의 도시를 만든다 - 4편 개별성 도시로써 근대도시

조용준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칼럼

도시디자인이 ‘사람의 도시’를 만든다 4편-개별성 도시로써 근대도시 ​ 조 용 준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 前)광주광역시도시공사 사장 前)한국주거학회장 前)한국도시설계학회 부회장 前)중앙도시계획위원 이미지 에버니저 하워드의 내일: 사회개혁으로 가는 평화적 여정에 수록된 사회적 도시의 다이어그램, 1898년 처음 출간 되었으나 그 이후 내일의 전원도시로 변경 (출처-역사로 본 도시모습 양윤재역, P194) 산업혁명 이후 도시인구의 급증과 공장 등의 출현으로 현대도시구상 등을 비롯하여 건축가들의 도시 도전이 시작되었다. ​ 한때, 분업화가 만든 개별성을 가진 신도시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이는 지역주의가 만들어낸 도시 형태와 도시문화는 고유성이 사라졌다는 비판도 있었다. ​ 이후 일체성 도시로써 도시디자인 반향은 건축가들의 다양한 도시디자인론이 일었으며 도시에 내재하는 철학적 시야에서 도시공간과 도시디자인은 변화되어왔다! 근대 도시 사조의 출현 건축가들의 도시 도전 ​ 산업혁명은 도시인구의 급증과 공장 등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런던의 경우 19세기 초에 96만 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1841년에 195만 명, 1887년에는 420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유럽에서는 19세기 중반경에, 미국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일본에서는 19세기 말에 일어났다. ​ 이는 도시환경의 악화와 교통난은 물론, 생산력 저하로도 이어지면서 이의 규제법은 물론, 새로운 도시사조 출현을 가져왔다. 영국에서는 1848년에 공중위생법이, 1851년에 노동자 계급 숙사법이 제정되었고, 1894년에는 런던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들에서 도로 폭, 벽면선, 건축 주변의 공터, 건물 높이 등의 규제가 행해졌다. ​ 미국에서는 1860년에 불량주택이 전염병의 원인이라고 여기고, 보건위생 측면에서 아파트 주거법이 제정되었다. ​ 1853년 영국 기업가인 솔트 경은 교회, 병원, 주택 등 공공시설을 갖춘 노동자를 위한 직물공장의 도시 “솔테이어”를, 1881년 미국 침대차 제조회사 폴맨도 공장에 부속된 뉴타운을 건설했다. ​ 영국의 “R. 오웬”이나 프랑스의 “F.C 프리에”등도 공장을 가진 이상적인 커뮤니티를 제시했다. 1902년에는 에버니저 하워드의 새로운 도시계획 원리를 담은 내일의 전원도시(내일: 참다운 개혁에 이르는 평화로운 길의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 이 구상은 대도시로부터 떨어진 곳에 도시와 농촌의 매력을 겸비하고 공장이 있는 3만여 명이 살고있는 도시였는데, 이에 기초하여 1903년 레찌 웨스에 전원도시 건설을 위한 전원 도시회사가 설립되었고, 1919년에 웰윈에 건설을 위한 전원도시회사가 설립되었다. ​ 레찌 웨스는 필자도 가본 적이 있는데, 넓은 전원과 주택의 결합이 인상적이었다. 1917년 건축가 토니가르에의 공업도시 계획안, 1922년 르꼬르뷔지에의 인구 300만 명의 현대도시구상 등을 비롯하여 건축가들의 도시도전이 시작되었다. ​ 분업화가 만든 개별성의 신도시들 1928년에 르꼬르뷔지에 등이 근대건축가 국제회의(CIAM)를 결성하고, 1933년 아테네 회의에서 도시는 ‘태양, 녹음, 공간’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도시를 용도별, 용적별로 분리하고, 이 사이를 자동차가 연결하는 분리와 개별성의 새로운 도시 사조였다. ​ 특히 토지 이용계획과 건축, 토목, 조경 등을 자동차의 생산라인처럼 분리하고, 이들 각기에게 자유를 주고, 도시는 이를 집합하기만 한 분업적 도시개발 방식은 도시 환경개선은 물론, 산업사회 요구를 충실하고, 신속하게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 여기에는 건축이 양식, 역사성, 지역성 등을 버리고, 철과 유리와 콘크리트로 구성된 라멘구조의 박스형 건축의 공헌도 있다. 이 사조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의 고층 건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저 입지하고, 이 사이에 자동차를 위한 넓은 도로와 공원이 있는 르꼬르뷔지에의 300만명 도시를 위한 투시도’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사조는 여러 나라의 건축 관련법에 많이 반영되기도 했다. 사진 최초의 전원도시 리찌웨이(Letchworth), 에버니저 하워드의 전원 도시 사상을 반영하여 1903년에 제1전원도시회사가 설립되어, 154,476제곱킬로미터에 32,000명의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분업적 도시 사조가 택지개발 촉진법과 결합하면서 5년이면 한 개씩의 신도시(택지개발지구)가 도시외곽지역에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거리개념을 시간개념으로 바꾼 자동차 공헌도 있다. ​ 도시외곽지역의 개발은 자동차가 있어서 가능했고, 자동차의 도시지배로 이어졌다. 이는 짧은 기간에 주택 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일정이상 생활 수준 향상과 편리함도 주었다. 또 직업의 세분화와 함께 많은 직장도 만들어 주었다. 근대도시 사조의 비판들 근대도시 사조는 1960년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많은 건축가 학자들의 비판에 직면했다. 지나친 산업적 기능적 추구로 인해서 전통 커뮤니티 해체와 범죄 발생은 물론, 지역주의가 만들었던 도시 형태와 도시문화의 고유성이 사라졌다는 비판도 있었다. 가로 연속성 단절로 인해서 근린사회의 일체성이 파괴됐다는 비판도 있었다. ​ 자가용 의존으로 에너지 소비 증가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범죄증가와 도시와의 대면성 약화를 가져왔다는 비판도 있었다. 시가지면적의 확장으로 인해 도심지역의 공동화를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 법에서 정한 용량과 용적의 배분 지침을 바탕으로 토지이용계획을 수립하고, 수립지침을 근거로 용도별로 기능별로 면적을 배분 배치하는 것은 임의적 수치의 달성을 목표로 하는 위생도시를 만드는 것과 같다는 비판도 있었다. ​ 도시혼란은 근대도시계획과 건축이 받아들인 분업화와 무분별한 자유의 반대급부로 생성된 파생물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도시이미지는 그 도시에 대한 평가인데도, 이를 소홀히 하였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72년 미노루 야마사키가 설계한 미국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33동의 플로이트 이고우 주거단지가 폭파되었다. ​ 이 주거단지는 미국건축협회상을 수상한 주거단지로써 당시 미국의 경제 수준을 반영 하듯이 잘 계획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입주한 사람들은 흡사 기숙사 같아서 예전처럼 마음 편하고, 자유로운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떠나가면서 범죄 등이 발생하게 되어 폭파했다. 건축가 찰스 젱스는 모더니즘의 임종이라고 했다. 이미지 건축가 구로가와 깃쇼의1961년 Helix City (출처-黑川紀章 都市テザインの 思想と 手法 P17) "도시학자 제인 제콥스는 모더니즘적 도시는 더 이상 사람들을 즐겁게 하거나 아름답게 하지도 않는다면서 집단적 건축규제를 통한 도시개발과 도시 관리 수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들 비판은 도시디자인출현의 당위성이기도 했다." ​ 일체성 도시로서 도시디자인 다양한 도시디자인론 ​ 역사적으로 볼 때 한 사조 끝나고, 새로운 사조가 시작될 때에는 기존 사조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새로운 사조의 논리가 제시되곤 해왔는데, 도시도 그러했다. 새로운 도시 사조의 가장 강력한 분출은 미국과 일본에서 일어났다. ​ 1957년 펜실바니아 대학를 시작으로 하버드 대학(1960년) 도쿄대학(1962년)에 도시디자인 학과가 신설되어 졌다. 산업도시를 지지하던 C.I.A.M의 10회를 준비하던 유럽의 젊은 건축가들이 결성한 팀10은 연맹, 정체성, 클러스터, 모빌리티 등의 새로운 개념을 주장했다. ​ 일본의 메타볼리즘그룹(1960년)도 도시를 신진대사로 정의하면서 여러 도시상을 제시하였고, 영국의 아키그램도 새로운 도시를 제안했다. 미국 시카코에서는 컬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발견 400년을 기념하여 열린 박람회를 계기로 도시미 운동이 일어났다. ​ 시카파 건축가 다니엘 번함이 주도한 이 박람회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이탈리아, 프랑스 등 각종 건축양식을 망라한 화이트 시티가 등장했다. 1960년에는 케빈 린치가 거대도시의 이미지를 해석하는 도시 이미지를 발표했고,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패턴 랭귀지에 의한 디자인 방법도 제시되었다. 흑인이나 저소득층의 이익이 반영된 에드보카시 이론도 생겨났고, 현실이 갖고 있는 다양성이 반영된 에드호(Ad hoc)시즘도 등장했다. ​ 건축과 도시의 관계를 단순히 건축물의 산술적 집합 관계로 보는 시각에서 탈피하여 부분과 전체의 관계 이론으로 해석한 노베르크 술츠의 부분과 전체 이론, 도시경관의 구성사례를 하나의 이론체계로 발전시킨 고든 켈렌의 연속시각이론, 근대 도시조성 원리인 단순한 나무구조와는 달리 도시를 구성하는 각 단위들이 부분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동시에 또 다른 부분의 집합요소로서 작용한다는 크리스토퍼 알랙산더의 세미 레티스구조도 등장했다. ​ 이들의 공통점은 건축과 도시의 관계를 다시 분석하고, 건축을 도시구성의 중요한 요소로 하자는 것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19세기에 형성된 구시가지 재개발에서 기존환경을 살리면서 정비하는 안이 선택되었다. 이러한 수법은 베를린의 구도심 크로이츠 베르크의 정비에도 적용되었다. ​ 1967년 필라델피아 도시계획 실행위원장인 에드먼드 베이컨은 필자가 번역한 책 ‘Design of Cities’에서 중세도시를 모형으로 물리적공간 구성의 기본자세를 분석하여 역사의 흐름에는 유사함이 존재한다면서 도시디자인모형을 제시했다. 1974년에는 뉴욕의 도시디자인 실무를 담당했던 뉴욕시립대학 건축학과 조너단 바넷 교수가 “건축을 디자인하지 않고도 도시를 디자인한다”는 Urban Design As Public Policy를 출간하여 도시디자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그는 영화산업발달로 침체된 뉴욕시의 브로드웨이 재생에서 세계적 모델이 된 건축규제와 인센티브를 도입하여 도시 활성화를 도모하였고, 공적 계획규제로서 도시디자인을 제시했다. 필자는 2009년에 국내 어떤 기업에서 기업도시 설계자로서 한국에 왔던 그를 만난적이 있었는데, 이상성이 매우 높은 계획이 인상적이었다. 이미지 메타볼리즘의 도시론 출처-黑川紀章 都市テザインの 思想と 手法 P11 일본 건축가들의 구체적 공헌 새로운 욕구분출의 한 축인 일본의 도시디자인 태동은 C.I.A.M에 참가한 마에카와 구니오, 단게 겐조의 영향도 있었고, 도쿄 올림픽(1964년)과 오사카 만국 박람회(1970년)의 2개 이벤트 장소 계획을 경험하면서 건축설계와는 다른 건축의 중요성의 깨달음도 있었다. ​ 1960년 건축가 기요노리 기쿠다게, 깃쇼 구로가와, 후미히코 마키 등은 상공회의소의 후원 아래 교토에서 개최한 세계디자인 대회를 준비 하면서 ‘건축적 요소의 성장, 변화, 융통성, 상호변화의 가능성, 집단적 형태 등을 주제로 변화 혹은 변환’을 의미하는 독립된 사상인 메타볼리즘 (Metabolism) 그룹을 조직하여 건축과 도시를 결합하는 여러 도시 상을 제시했다. 특히 도시에의 시간성 도입, 과정적 발전의 필요성, 도시디자인 발전 단계의 역사적 정리 등 기능주의 개념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구조 개념의 도입, 심볼 배치, 도시경관 형성을 위한 건축군의 조형 개념을 도입했다. 20세기 건축계는 1920~1960년대까지의 기능주의와 1960년대부터 구조주의라는 두 개 이론이 존재했는데, 단게 겐조는 ‘기능, 구조, 그리고 상징’이라는 글을 통하여 이 두 개의 거대한 사조를 명확히 구별했고, ‘도쿄만 계획 1960’을 발표했다. 이 계획안은 팽창 가능한 선형구조로서, 더 작은 구조단위로 분할될 수 있는 구조주의라는 새로운 도시계획개념을 반영하고 있었다. ​ 오타니 유끼오의 ‘코우지마치 계획 1960’, 오다카 마사히토와 마끼 후미꼬의 ‘신주쿠 재개발계획 1960’, 구로가와 기쇼의 ‘헤릭스 시티 1961’, 기꾸다께 기요노리의 ‘탑상도시 1959’와 ‘해상도시 1963’ 등은 구체적 제시였다. 또 단게 겐조의 건축·도시에 대하여(신건축, 1960), 구로가와 기쇼의 도시디자인 방법론과 메타볼리즘 방법론(국제건축, 1960, 1963), 오끼 타네오의 건축 디자인에서 도시디자인으로 접근(건축, 1961), 오타니 유끼오의 Urbanics 시론(건축, 1961),오타니 유끼오와 기꾸다께 기요노라의 도시디자인과 건축사이(국제건축, 1965)도 있었다. 특히 도쿄대학에 모인 단게 겐조 등의 건축가, 학자 등의 연구체 활동 결과인 일본의 도시공간(1961년), 현대 도시디자인(1963년), 일본의 광장(1971년)이 건축잡지인 건축문화에 특집형식으로 발표되었다. ​ 이중 일본 도시를 패턴, 엘리먼트, 시스템의 3가지로 분석하고, 디자인 수법을 카다로그 형식으로 분류한 ‘일본의 도시공간’ 은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여기에서는 역사 환경과 광장의 중요성도 강조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도 이소자끼 아라타 ‘건축의 해체’, 요시노부 아시 하라의 ‘외부공간의 구성 건축에서 도시로’ 외부공간의미학, 속·외부공간의 미학, 후미꼬 마키의 ‘도시에 내재하는 철학’ 등 많은 건축과 도시공간에 관련된 책이 봇물처럼 출간되어, 도시디자인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했다.

유행병이 번질 때 관(官)이 할 일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칼럼

지금 세계는 대재앙을 맞았습니다. ‘코로나19’라는 신종 유행병이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갑니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 대한 걱정도 해야 하지만, 우선 우리나라의 전염병이 더 큰 문제입니다. 환자는 급증하는데, 치료할 시설이나 장비가 부족해, 더욱 크게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정권의 반대 입장에 있는 정파들은 모든 것이 정부의 잘못이라고 몰아붙이면서, 해결책의 제시나 협조는 커녕 오로지 정부의 잘못으로 몰아붙여 정치적 반사이익이나 얻으려는 흑심은 더욱 국민들을 분노하게 해줍니다. 너무나 무섭게 번지고, 또 그 전염 속도나 전염된 숫자가 급증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갑자기 당하는 일이어서, 여기저기에 허점도 드러나고 빈틈에서 잘못이 새어 나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정부의 입장도 이해해 볼 분야가 많습니다. 200년 전 다산은 그런 무서운 전염병이 크게 유행할 때, 정부나 지방정부는 어떤 조치를 취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세심한 내용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특히『목민심서』의「애상(哀喪)」조항,「관질(寬疾)」조항에도 나오지만「진황(賑荒)」편의 「설시(設施)」조항에는 분명하게 말한 내용이 많습니다. "기근(飢饉)이 든 해에는 반드시 전염병이 번지게 되어 있으니, 그 구제하고 치료하는 방법과 거두어 매장하는 일은 마땅히 더욱 마음을 다해야 한다." 라고 전제하여 목민관이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산의 시대와 오늘의 시대는 다릅니다. 기근이 있는 해에만 유행병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때는 의료시설이나 병원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요즘으로 보면 최악의 의료제도와 의약기술의 열악한 상태에서의 조치였습니다. 관에서는 약을 공급하는 일부터 하라고 했습니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의 숫자를 파악하고 명부를 작성해야 하며, 사망자가 나오면 빠짐없이 그 숫자를 파악해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온 집안이 몰사하여 시체를 처리할 사람이 없을 경우는 관에서 직접 처리할 방법을 강구해 주고, 그 마을의 유족한 집안에서 돈을 주고 인부를 사서라도 유감없이 처리하기를 권장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위급한 때에는 목민관이 직접 현장에 나가 순행하면서 물색(物色)을 살피고 사정을 물어서, 혹 몸소 환자의 집에 들러 환자를 위로해 주고, 상가(喪家)에 들려서는 장례 문제를 함께 직접 논의하기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어려운 때일수록 목민관이 자주 민간에 나가서 어진 정사를 힘써 행하면 그 애감(哀感)과 열복(悅服)이 어떠하겠느냐면서, 하루의 수고가 만세의 영광이 될 터이니 그런 일을 달갑게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우매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현장을 찾고, 국무총리가 상주하면서 진두지휘하는 조치는 다산의 뜻과 부합되는 일로 여겨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심은 대동소이합니다. 환자 숫자나 사망자 숫자는 정확히 파악하여 상부로 보고하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일인데, 그 당시에도 상부의 문책이 두렵고 여론이 두려워 가능한 숫자를 줄이고 숨기려는 작태가 있었다면서 그런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정성을 들이면 어떤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방역 체제를 물샐틈없이 마련해 정성을 다하면, 현대의 의학 수준은 못 잡을 전염병이 없습니다. 너무 두려워하거나 공포에만 떨지 말고 전문가들의 말을 잘 듣고 사심 없이 공심으로 대처하다 보면 반드시 전염병은 잡아집니다. 정략적인 주장만 늘어놓거나 방역에 방해되는 말은 삼가고, 국민 모두가 성의껏 대처하면 종식은 되고 맙니다. 다산의 가르침 잊지 말고 정성을 다하는 목민관들이 많이 나오기만 바랄 뿐입니다.

도시디자인이 사람의 도시를 만든다 - 3편 중세의 도시디자인

조용준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칼럼

도시디자인이 ‘사람의 도시’를 만든다 3편-중세의 도시디자인 ​ 조 용 준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 前)광주광역시도시공사 사장 前)한국주거학회장 前)한국도시설계학회 부회장 前)중앙도시계획위원 사진 루브르 궁전 앞 광장 피라밋지하공간 오스만 시장의 파리 개조 ​ 파리 발전은 세느강에 있는 시테섬에서 시작됐다. 고대 파리는 북쪽의 로마에서 뻗어온 도로(리 드보리)가 시테섬을 지나 강 건너편 남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시테섬은 도심 역할과 함께 남북방향의 대가로(大街路) 발전을 견인했는데, 당시 동서 방향의 대로는 루브르궁까지 밖에 미치지 못했다. 사진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궁전의 힘 ​ 오늘날 파리 발전의 중심점은 루브르궁으로 이 역사는 중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정방형의 평면을 갖고 있던 루브르궁은 루이 14세 때 약 4배로 확장됐다. 이때 중요시한 것은 동쪽의 파사드 디자인이었다. 파사드는 단순히 루브르궁전의 동쪽을 대표하는 것 이외에도 서쪽으로 추이루리를 지나는 도시 축 의미도 있었다. ​ 18세기가 되면서 루브르궁전 서쪽의 바로 앞에 튈레리 정원과 콩코드 광장이 입지해 도시 축의 시작점이 됐다. 루브르궁전을 중심으로 동쪽 축(대가로) 주변에는 루이13세 광장(보쥬광장) 시청사 바스티유광장이 서쪽 축 주변에는 반돔 광장 빅토와르 광장(루브르 북쪽) 등이 입지했다. ​ 도시발전이 남북방향에서 루브르궁을 거점으로 동서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루브르궁전의 힘은 서쪽 축에 있는 에드와르 개선문을 거쳐서 라데팡스의 그랜드 알슈(신 개선문)에까지 미쳤다. 일찍이 건축의 밀어내는 힘이 도시 개조에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 오스만 시장의 공헌 ​ 파리의 본격적 개조는 귀양지인 런던에서 런던식 도시디자인에 강한 영향을 받은 나폴레옹 3세가 정권을 잡은 후 오스만에게 파리시장을 맡기면서 시작됐다. 오스만은 루브르궁전을 중심으로 동쪽은 니시옹 광장까지 서쪽은 에드와르 광장(개선문)까지를 연결하는 큰 도시 축을 만들어 시각적 조망을 확보했다. ​ 그는 폭이 매우 넓고 일직선인 대가로를 만드는 사업 외에도 ​ 대가로변 건물의 통일된 파사드 형성 시테섬에 관공서 재판소 병원 등 공공시설의 입지 서쪽 브로뉴 숲과 동쪽 반센트 숲 정비 북쪽 뷰트 쇼몽공원과 남쪽 몬스리 공원 확보 조명 수도 하수도 등 도시기반 시설 설치 등을 이뤘다. ​ 이 과정에서 대가로 변에 인접해 있던 3/7 정도의 건물이 파괴됐다. 필자도 지하 하수도를 견학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 이러한 규모의 지하 하수도를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일본 건축가 구마겐고는 오스만의 파리 개조에서 강조돼야 할 점은 피규어(건물)가 위치하는 장소의 교묘함이라고 했다. ​ 볼버드(boulevard)라 불리는 대가로의 네트워크를 파리에 순환시키고 피규어가 되어야 할 건물(예를 들면 구 오페라 하우스)을 대가로의 결절점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결절점은 당연히 시각상의 초점이 됐고 피규어는 가로를 걷는 사람들에게 점차 강한 시각적 인상을 부여했다고 했다. ​ 오스만이 피규어와 그라운드(땅, 지형)라는 구조와 도로의 퍼스펙트에 의해서 형성되는 도시의 시각적 구조를 링크시켰다는 것이다. 오스만 시장의 최대 업적 중 하나는 쾌적한 보행자 공간 조성이다. ​ 오스만 시대를 연구하던 발터 벤야민은 파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보행자’라고 불렀다. 걷는 장소에 대해서도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것 만으로도 그 장소는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미테랑 대통령의 공헌 ​ 프랑스 혁명 200년을 기념해 미테랑 대통령은 1989년 오르세미술관, 라빌 레트 과학 공원센터, 그랜드 알슈 등 9개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입안해 실행했다. 9개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큰 화제를 불러온 것이 라데팡스의 그랜드 알슈 국제현상 공모였다. 현상 공모 결과 2개 안을 선정, 미테랑 대통령에게 위임해 그랜드 알슈가 선택됐다. ​ 이처럼 파리는 루브르궁전이 밀어내는 강력한 힘을 통해 콩코드 광장- 에드와르 개선문 - 라데팡스가 성립되었는데, 그랜드 알슈의 전망대에 오르면 탁 트인 일직선 대가로와 함께 에드와르 개선문과 루브르궁전이 한눈에 보인다. ​ 필라델피아의 도시 골격을 만든 에드먼트 베이컨은 이를 ‘확장성장’이라고 말하면서 라데팡스 개발은 상업적 개발의 맹공을 받고 있는 역사 도시에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 구마겐고는 19세기 파리의 도시 프로듀서가 오스만과 나폴레옹 3세였다면, 20세기 프로듀서는 미테랑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 로마 개조나 파리 개조는 도시디자인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의 비전과 실행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 지역적 그라운드와 피규어의 일체적 도시디자인 ​ 중세도시 가운데는 도시 디자인적 공헌 사례가 많은데 기본은 지역적 그라운드와 건축의 일체적 관계의 실현이었다. ​ 지역적 그라운드란 작은 지형은 물론 마을 가로공간 등의 인공적 질서를 의미한다. 시골 지역 휴양도시인 바드를 도시 디자인했던 건축가 존 내쉬의 공헌이 반영된 런던 중심지 리젠트 거리가 대표적인 예다. 리젠트 공원과 세인트 제임스 공원 사이를 연결한 이 거리는 거리와 건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도시디자인, 굴곡진 가로와 조화를 이루는 건물의 배치와 형태, 그리고 시각이 변화되는 굴곡점에 있는 작은 랜드마크적 건물 형태 등은 그의 의도가 반영된 곳이다. ​ 에드먼드 베이컨은 이에 대해 비교적 완만하게 구부러진 이 거리는 광범위한 디자인구조와 세부적인 건물이 분리되지 않고 일체화되었으며, 건물들 스스로가 근원적인 디자인 개념을 전진시키고 유효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서 리젠트가의 굴곡을 허용하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 건축가 크리스토 렌이 테임즈강과 작은 규모의 여왕 주택 사이에 왕립해군 대학을 디자인하면서 여왕 주택이 테임즈강의 시각적 기운을 그대로 느끼게 한 것도 마찬가지다. 또 2개의 광장을 교묘하게 연결한 토티의 광장,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피렌치의 시노리아 광장도 그러하다. ​ 그 밖에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직선으로 보이는 포토맥강 변의 링컨기념관과 백악관에서 직선으로 보이는 포토맥강 변의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의 시각적 전개와 함께 두 가지 시선이 교차되는 지점에 설치된 166미터의 워싱턴 기념탑은 베니스와 플로렌스가 연상되는 잘 의도된 도시디자인이다. 이미지 파리의 도시디자인구조 도시적 그라운드와 피규어의 위계적 배치 ​ 중세도시에서의 도시디자인 공헌은 가로나 광장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의 도시적 그라운드에서도 볼 수 있다. ​ 프라하는 볼타강 건너편 높은 지역에 슈테른 베르크 궁전과 몇 개의 성당이 입지해 있고 낮은 지역인 구시가지에는 바츨라프 광장 공화국 광장과 성당들이 자리해 거점 기능을 하고 있다. ​ 부다페스트 역시 도나우강 건너편 언덕에 부다 왕궁이, 강변 낮은 지역에는 성 이슈투반 성당과 에리제 베트 광장, 바찌거리 등이 입지해있다. 비엔나는 도시 중심에 왕궁이 있고, 주변에는 주요 거리와 광장과 공공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이처럼 궁전(영주)이나 성당 등은 모든 지역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위치나 도시 중앙 등 도시적 그라운드에 입지했고, 그 앞에는 공적 활동이 일어나는 광장과 주요 가로(街路)가 이어져 있었다. ​ 궁전은 위엄을 보일 수 있는 규모와 높이를 갖고 있었고, 성당은 하늘을 향한 뾰족탑 형태로 입지했다. 일반 시민들의 주택은 계급을 표현하는 복장과 같이 동일한 높이와 형태, 색채 등을 하였다. ​ 건축과 도시공간은 일체적이고 시각적인 효과를 만드는 도시공간과 직선 가로 광장은 아름다운 도시의 레이아웃으로 평가받았다. ​ 에드먼드 베이컨의 말처럼 중세도시는 건축 형태는 도시 디자인 구조 속에서 나와야지 다스려서는 안되며, 형태는 창의적 흐름을 방해하거나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중세도시의 비판 ​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일어났던 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산업적·기능적 합리성을 위한 분업화가 도시에 적용되면서 도시는 효율성을 절대가치로 하는 기능적 기계적 역할을 요구했다. ​ 특히 1933년 아테네에서 개최된 C.I.A.M 제4차 회의에서 도시의 무질서한 팽창과 환경 악화를 제어하고, 양질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역사 도시와는 다른 기능적 도시관이 필요하다는 선언 이후에 건축과 도시가 일체적으로 결합하는 도시상과 양식적 전개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도시사조는 급격히 붕괴되고 산업적·기능적 합리성을 목표로한 기능주의 사조가 신속하게 세계의 도시들을 지배했다. ​ 당시 도시는 농촌인구의 대량 유입과 함께 공장의 연기나 배수, 주택의 오수가 환경을 크게 악화시켰다. 열악한 환경에 의한 전염병으로 많은 사망자가 생겨나면서 기능주의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전통 건축이나 지역성, 도시 패턴은 근대의 산업적·기능적 합리성을 저해하기 때문에 새로운 건축이나 도시 사조로 대체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양식주의 도시는 산업적·기능적 합리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비판을 받았다. ​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의 에베네저 하워드의 전원 도시계획과 르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이론이 발표되면서 근대 도시 사조는 세계 각국의 뉴타운에 모범답안처럼 장착돼갔다. ​ 특히 빛나는 도시이론은 건축법과 도시계획법에 많이 스며들었다. 이는 건축과 도시공간이 결합하는 일체성 도시의 붕괴와 함께 건축과 도시공간이 분리된 개별성 도시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

다산의 생각과 영화 '기생충'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칼럼

‘미쳤다!’라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경천지동의 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기생충’은 한국어로 쓰고 한국 자본으로 만든 토종 한국영화다.”라고 말했듯이 토종 한국 영화가 영화의 상으로는 가장 권위 있는 아카데미상으로 4개 부분을 석권한 쾌거라 나왔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 상의 제도가 생긴 이래 최초의 외국어로 된 영화가 작품상을 받았고, 각본상과 감독상에 국제 영화상까지 받은 대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선 감독과 제작진들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해드리면서, 한국인으로 동시대에 살면서 그런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선 ‘기생충’의 어떤 면이 우수해서 그런 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언론에 보도된 내용으로 보면 봉준호 감독의 말에 그 해답이 보입니다. “기생충은 가장 한국적인 것들로 가득 찼는데 오히려 한·미프로덕션이 합작한 ‘옥자’보다 더 여러 나라에서 사랑받는다. 주변에 있는 가장 가까운 것을 들여다봤을 때 전 세계를 매료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감독은 말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라는 어떤 감독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자신도 그런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되지 않았느냐는 답변을 했습니다. 세계 언론들의 찬사를 종합해보더라도 ‘기생충’의 수상은 언어의 장벽도 넘었고 국경의 장벽도 넘어 ‘세계의 승리(a win for the world)’라는 극찬을 받기에 이르렀다고 했으니, 시대의 변화에 덕을 보기도 했지만, 내 것, 우리 것, 내 나라 전통과 역사에 대한 지극한 애착에서 빚어진 위대한 승리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200년 다산의 ‘호아(好我)’ 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산이 살아가던 19세기 초, 중화주의에 매몰되어 몰민족의 깊은 수렁에 빠진 민족의 현실을 개탄하던 다산의 우국충정을 생각해야 합니다. “최근 수십 년 이래로 한 가지 괴이한 논리가 있어 우리 문학을 아주 배척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옛 문헌이나 문집에는 눈도 주지 않으니 이거야말로 큰 병통이 아니냐?” 면서 우리 것, 내 것, 우리 역사와 전통을 익숙하게 알아야만 좋은 글을 지을 수 있다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가장 가까운 곳을 들여다봤을 때 전 세계를 매료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를 그때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귀양살이 시절에도 강진의 농촌이나 어촌의 백성들 삶의 모습을 참으로 사실적으로 시로 읊는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래서 또 자신은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조선 시를 짓겠노라 하면서, 한글의 어휘를 한자로 차음한 많은 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인 한시에서 용인될 수 없는 파격적인 시가 그렇게 해서 저작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에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 바로 다산의 생각이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고, 가장 세계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이라는 통상의 주장 또한 다산의 생각이었으며 오늘 세계인들의 생각입니다. 이제 기생충은 우리 국민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꿀 엄청난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내 것은 싫고, 내 것은 천하고, 촌스럽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우리의 현실, 우리의 전통, 우리 고전, 우리 옛 역사도 추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리라고 믿어봅니다.

도시디자인이 사람의 도시를 만든다 - 2편 도시디자인 출현과 과정

조용준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칼럼

도시디자인이 ‘사람의 도시’를 만든다 2편-도시디자인 출현과 과정 ​ 조 용 준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 前)광주광역시도시공사 사장 前)한국주거학회장 前)한국도시설계학회 부회장 前)중앙도시계획위원 사진 히드리아누스가 황제묘로 건축한 카스텔 산타안젤로성 도시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다양한 모습을 가져왔다. 어떤 도시는 중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도 하고, 어떤 도시는 중세의 흔적을 지우고 그 위에 근대 도시를 새롭게 만들기도 했다. 전자는 양식주의로 불리는 유럽의 역사 도시들이고, 후자는 기능주의(국제주의)로 불리는 우리 도시들이다. 이같은 구분은 건축과 도시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도달 지점은 건축의 존재 방식이 된다. 일체성 도시에서 개별성 도시로 중세 도시는 도시의 공공성 확보와 조화가 우선적 가치가 될수 있도록 건축을 규제하는 건축과 도시의 일체적 관계를 중시했고, 근대 도시는 건축의 이익과 자유가 실현되도록 건축과 도시의 분리적 관계를 중요 가치로 삼았다. ​ 일본 건축가 소네 소우이치는 도시에 대한 인식은 건축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하며 3가지 도시 구성 방법을 소개한다. 그는 건축을 같은 유형과 서로 다른 유형으로 구분하고 함께 존재하는 요소의 양상에 따른 형태 인식을 통하거나 건축개체 및 그의 군 단위 기능, 건축개체의 상호관계 인식을 통해 도시 구성방법을 확립한다고 말한다. ​ 그는 첫번째 이론의 사례로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 케빈 린취의 도시구성을 소개한다. 두번째 예로는 C.I.A.M의 기능적 도시구성을, 마지막 예로는 구조주의 구성방법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이 3가지 사례는 각기 형태, 기능, 구조에 주안점을 두고 발전해왔다. ​ 도시는 시간과 공간의 결합물이 분명하지만, 이처럼 건축이나 도시 사조는 건축의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건축과 도시의 관계에 의해 구분돼 왔다. ​ ‘일체성 도시 고대, 중세도시’ 고대도시, 아크로폴리스의 공간 구성 ​ 도시를 새로 만들거나 대규모로 개조할 때는 계획적 의도가 작용한다. 고대부터 중세시대까지는 건물의 배치나 조형성을 통해, 근대시대에는 건물의 기능성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느껴지도록 해 왔다. 이의 대표적 고대도시가 그리스다. ​ 이 도시는 아크로폴리스, 아고라(광장), 스토아(상점)로 구성돼 있었는데 가장 높은 위치인 산 정상에는 정신적 지주인 파르테논 신전과 에릭테이온 등이 있는 아크로폴리스가 입지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원경으로 올려다 보이는 낮은 평지에는 정치나 철학을 논하고, 상거래를 하는 생활의 장소 아고라가 스토아 등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데, 위요(둘러쌈)를 만드는 배치는 아주 자유로우면서도 위요감이 느껴지는 의도적 배치였다. ​ 푸른색 선은 순례자의 길, 노란색 선은 헤파이스테이선전에서 스토아쪽의 시선방향 - 출처 (도시다지안+도시언어 조용준외 역 p70) 아고라에 인접한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는 헤파이스테이온 신전이 큰바위 얼굴처럼 입지해 아고라를 지켜주는 듯했다. 외부에서 오는 순례자들에게는 가장 먼저 보여지게 하는 이정표 역할을 했고 점차 가까워지면 순례자들은 자연스레 경건한 마음을 갖게했다. ​ 헤파이스테이온 신전 앞 계단에 서면 아고라는 물론 순례자들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는데, 시선이 아고라를 넘어 멀리까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아고라 아래쪽에 긴 스토아를 배치했다. ​ 스토아의 전면은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배치해 기둥 사이로 아고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순례자들의 움직임을 인지하도록 했다. 또 아고라가 순례자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으면서도, 순례자들이 아고라의 전경을 볼 수 있도록 적절한 공간적 분리를 한 게 특징이다. 순례자들이 아크로폴리스 입구에 오르면 파르테논 신전 등의 전체 건물이 한눈에 보이도록 부채살 모양으로 배치했다. ​ 그리스 폴리스는 BC 600년부터 AD 287년까지 오랜 기간 걸쳐 완성됐는데도 마치 한 시대에 계획되고 형성된 것처럼 도시디자인의 의도가 변질되지 않고 계승됐다는 점이 실로 놀랄만하다. ​ 그리스 건축가 독시아디스는 순례자들이 아크로폴리스에 오르면서 처음 보게되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건물을 배치했는데 특히 파르테논 신전은 각 부의 비례까지를 명확히 계산해 자리를 정했다고 한다. ​ 필라델피아 도심공간 구조 형성에 큰 공헌을 남긴 에드먼트 베이컨은 아고라에서부터 아크로폴리스까지의 ‘범 아테네 길’은 지구상에서 가장 잘 디자인된 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고대도시인 로마는 휴먼스케일을 넘어 위압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배치나 형태가 많았다. 특히 도시 중심 광장 역할을 하며 상거래, 재판, 집회, 축제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포로 로마나는 바실리카, 신전, 열주회랑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주변 건물과도 축선으로 연결돼 극히 위압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 사회활동과 임의활동이 자유롭게 일어날 수 있도록 한 아고라와 필요활동이 일어나는 경직된 분위기의 포럼의 차이는 정치적 권력 구조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베로나, 팔마노바 등의 도시국가들도 구성 형태는 다르지만 현대 도시디자인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의도적 공간구성이 많았다. ​ 이미지 로마 중세도시의 도시디자인 ​ 중세도시의 대표적 도시디자인적 사례로는 로마와 파리의 대개조를 들 수 있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세워진 후 고대와 중세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긴 역사속에서도 훼손되지 않은 언덕에 입지한 기념적 건물이 많은 도시다. ​ 도시입구인 포플라 광장에서 시가지 쪽으로는 바부이노 대로와·휄로체 대로(주요 성당이 입지한 정신적 도로), 홀라마니아 대로(권력의 상징적 도로), 라페다 대로(묘나 신전 등 경건함의 거리)의 3개 대로가 시가지를 향해 부채살 모양으로 뻗어있다. ​ 오벨리스크가 자리한 이 광장은 바로크 도시의 시각적 정점이었다. 판화로 그려진 당시 지도를 보면 초기 로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정돈되지 않은 거리와 조금은 혼란스러운 외관의 성당들이 입지해 있었다. ​ 이런 로마를 대규모로 개조해 매력있는 도시로 만든 최초 공헌자는 16세기 로마 교황 식스터스 5세였다. 그는 신도들이 편하게 교회를 순례할 수 있도록 7개 언덕에 분산돼 있던 7개 교회를 연결하는 직선도로를 만들고 각 요소에 기념비를 배치했다. ​ 이 무렵에는 별 모양 패턴을 가진 여러 이상도시가 그려지기도 했고 건축과 도시의 르네상스 문을 연 건축가 브루넬리스키에 의해 원근법(투시도법)과 건물 배치의 비례가 건축과 도시디자인에 적용되기도 했다. ​ 르네상스의 도시 비전은 식스터스 5세의 로마 개조보다 앞서는데 광장 등의 공공공간에 공헌이 많았다. 집회, 시장을 위한 광장은 시청사, 교회, 재판소 등의 전면이나 도로 교차점 등 도시공간의 중요 요소에 설치됐다. 광장은 예술적 표현을 위해 조각 분수 등 장식요소가 도입되기도 했다. ​ 사진 로마의 스페인 계단 카밀로 지테는 로마 광장 연구를 통해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벽면, 지표면 넓이, 머리 위에 있는 공간 등 3가지 의 한정적 요소가 잘 조합되어야만 통일감이 생겨난다”고 주장하며 광장 원형을 5가지로 분류하기도 했다. ​ 조각가이자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는 캐피탈 언덕에서 전면의 가로변은 길고, 후면의 가로변은 더 짧은 역 사다리 모양의 광장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미지 1538년 안토인 라프레라의 판 속의 로마모습 전면에 성베드로 성당이 보이고 그 뒤쪽에 티베르강이 흐르고 있다. -출처(도시디자인+도시언어 조용준외 역 p136) ​ 전면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후면에서는 더 가깝게 보여지게하는 의도적 구성이었는데, 베니스 산마르크 광장도 마찬가지다. 서쪽의 포플라 광장에서 뻗어나온 휄로체 대로와 피아 대문이 만나는 4개의 분수 주변에는 바로크 거장 베르르니가 설계한 작은 교회 등이, 그 주변에는 식스터스 5세가 사망한 곳이자 대통령 관저인 팔쪼 퀴로날레가 있다. ​ 교회들은 오벨리스크나 원주를 세워 지형을 관통한 직선도로가 극적인 시계(視界)를 확보하도록 했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로마 시대 이집트에서 운반돼 온 것인데, 특히 식스터스 5세는 이중 한 개를 성베드로 성당 앞 거리의 거점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세웠고, 70년이 지나 베르니니가 성베드로 성당의 콜로 아케이드를 설계해 오벨리스크가 광장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 교황 식스터스 5세의 로마개조는 17세기 중반 크리스토퍼렌의 런던개조 계획(1666년), 18세기 샤르르랑팡의 워싱턴계획(1792), 오스만의 파리계획(1853-1869) 등으로 이어졌고 18세기 초 무렵에는 스웨덴, 독일, 스페인 등의 주택 도시에도 적용됐다. ​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

좌절과 포기를 모르던 다산의 삶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칼럼

새해를 맞았습니다. 소한도 지났으니 대한만 보내면 입춘이 옵니다. 새로운 각오로 불끈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모두의 삶은 괴롭고 고달프며 힘들다고만 합니다. 정치야 말이 아니지만 경제도 어렵기만 합니다. 어떤 지역의 아파트값은 내릴 줄을 모르고 집 없는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꿈은 멀어지기만 합니다. 누구를 만나도 살기에 편하다, 지낼 만하다, 이런 정도면 큰 불편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어려운 세상이 지금에만 그럴까요. 인류가 삶을 시작한 이래로 언제 이만하면 살만하다, 이렇게 좋은 세상이 언제 있었겠는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던가요. 동양으로 보면 요순시대 아니고 언제 ‘선치(善治)’가 있었습니까. 그래서 다산이 남긴 글에도 “백세토록 잘하는 정치는 없었다(百世無善治)”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세상은 오기가 어렵고, 오더라도 좋은 세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런 나쁜 세상만 계속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싫다고 입산해버리는 스님들이 나왔고, 가지기를 원하고 누리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는 노장사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해(苦海)’, 바로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은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이, 인간의 삶에는 의당 따라다니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참으로 고해라고 여겨 포기하고 좌절해버리는 인간의 삶은 향상될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나라가 한국이라는데, 그만큼 좌절하고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좌절의 끝이 바로 자살이기 때문입니다. 다산의 삶을 거울로 삼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 다산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도 많다. 그처럼 뛰어난 재주, 그만한 능력, 그처럼 높은 학식과 깊은 사상을 지녔으면서도 다산은 얼마나 억울한 삶을 보냈고, 얼마나 기막힌 세월을 살았던가. 그래도 그는 끝끝내 좌절하지 않았고 실의에 빠지거나 낙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힘들고 고단한 귀양살이에도 언제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인격을 닦는데 온갖 정성을 다 바쳤다. 낮을 짧다 여기고 밤을 지새우며 공부에 생을 걸었던 그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벼슬길을 차단당하고 온갖 수모와 고난을 무릅쓰고 ‘이제야 겨를을 얻었다(今得暇矣)’라고 생각하며 얻어낸 겨를을 ‘혼연스럽게 스스로 기뻐하였다 (遂欣然自慶)’라고 표현할 정도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용기를 발휘했었다. (『다산정약용 편전』서문) 라는 오래전의 글을 떠올리고 싶었습니다. 칠흑처럼 어둡고 괴롭던 전제군주제의 세상도 국민의 힘으로 민주주의 세상으로 바꿔냈고, 잘못하는 독재자나 어리석은 통치자도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던 것도 우리 국민들의 힘이었습니다. 더디고 느리지만 역사는 발전해가고, 어둠에서도 빛은 발해 지기 마련입니다. 괴롭고 힘들지만 희망을 지녀야 합니다. 다산의 글에 ‘하늘은 새벽이 오려고 하지 않는다(天不更曙)’라고 하고는 끝내는 ‘이천년 긴 밤에 샛별이 뜬다(二千年 長夜曙星)’라고 말하여 공자·맹자 이후 경학의 새로운 연구로 이천년의 긴 밤을 밝은 새벽으로 바꾼다고 했습니다. 다산의 그런 희망을 우리도 지녀야 합니다. 좌절과 포기에서 희망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새해를 맞아야 합니다.